'힘듦'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8/04/26 서서히 해결되고 있는 문제들, 그리고 기수대표직
  2. 2008/04/08 Aival Buu Hii, Hiivel Buu Ai! : 두려우면 하지 말고, (일단) 하면 두려워 마라!
  3. 2008/03/19 Bitgii Sanaa Zobooroi! (Don't Worry!)
  4. 2008/03/16 be okay
  5. 2008/03/11 선건강 후봉사? : 일주일간 병원비만 $100가 훌쩍
  6. 2008/02/21 몽골 국립도서관에서의 내 자리, 동양서고에서 자료기획과로
  7. 2007/12/13 2007.12.12. 꿈속
  8. 2007/12/13 2007.12.11. 기타(Guitar)
  9. 2007/12/13 2007.12.11. 또다시. 머리로 생각하는 이상
  10. 2007/11/27 결국 주저 앉았던.. 한 주 (5)

한달간 끙끙 앓아왔던 기관의 문제가 서서히 해결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다행이다."
몇 일간 이 말을 얼마나 나즈막히 혼자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너무나 다행이라고.

요새도 여러가지 스트레스와 엄청난 업무들로 바쁜 것은 여전하지만(그렇기에 또 몸도 남아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렇듯 한번 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나니, 차라리 이런 업무의 압박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다시금 마음도 다스려지고 있고, 또 정상적인 생활들도 하나 둘 찾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늘상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었던 (KOICA)기수대표 자리를 드디어 넘기게 되어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졌다.
솔직히 기수대표 자리가 힘들었다기보다도 자잘한 스트레스 원인중 하나였다고나 할까?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을 참으로 무한대로 참고 참고 참고, 그저 1년 가까이 이것을 억누르고만 있었으니 속병이 날만도 했던. 하지만 반대로, 정말 아니다 싶은 것들은 설령 단원들이 이것을 듣기 싫어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줬어야했는데 왜 늘상 이야기를 꺼내다말곤 했는지 조금은 후회가 된다. 설령 상대방이 귀를 막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수 대표라는 자리에선 끝까지 이야기를 해줬어야했는데 말이다. 한국인의 '나이'라는 잣대, 나로써는 좀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들만의 '예의 아닌 예의'라는 잣대.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사무소와 단원들 사이에서의 '샌드위치 상태'라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것보다도 난 정말 싫었었나보다.
더불어 진행하고 있는 큰 프로젝트도 두개나 있고, 그 밖의 기본 업무 외 추가 업무도 있고. 앞으로 더 바빠질 것이 당연하기에 지금부터 마음과 몸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뒤 모든 마음의 결정을 단숨에 내려버렸다.
더군다나 지금 이 상태라면 로테이션상 몽골 KOICA 전체기수대표까지 맡을지도 모르는 상황인지라 나름 개인적으로는 한껏 곤란했던 것. 이러한 활동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또 의미가 깊다는 것도 잘 알지만, 난 이것이 나의 단원생활보다 더 크게 자리를 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한다. 나에게 좀 여유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단원생활만으로도 빡빡한 일정들. 그렇다면 당연히 우선순위가 낮은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앞으로 기관 일에 올 인을 하기로 했다. 내가 있어야만하는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조금은 중도귀국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해보자고 나즈막히 홀로 중얼거리면서 스스로에게 충실해지자고 되뇌이고 되뇌였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과 행동,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약간의 휴식시간들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8/04/2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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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엔 이런 말이 있다.

"Aival Buu Hii, Hiivel Buu Ai!
두려우면 하지 말고, (일단) 하면 두려워 마라!"

지금의 나에게 무척이나 필요한 말.
모든 일들을 시작할땐 그 누구나 두려움이란 것을 느낀다. 하지만 어떠한 두 사람이 차이가 나는 것에는 그 이후의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이미 일을 시작했으면서도 계속 된 두려움을 느껴 행동이 다소 소극적인 사람과,
일단 일을 시작했으니 까짓껏 가보고 말자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적 무대포인 사람.

지금껏 후자에 속해있던 나이지만(일단 일을 시작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최근 무수한 심경의 변화로 자꾸만 전자에 대한 마음과 생각만이 급속도로 커지고만 있다. 나이가 들고 또 세상을 알면 알아갈수록 더욱 무서울게 없어야하거늘, 오히려 더욱 무서운 것들이 많아만지는 상황.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게 실수일때도 있고, 또 괜한 시간 낭비일때도 있거늘 최근 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맞서야하는 장벽들은 왜이리 끝도 없는지, 잠깐 고개를 갸우뚱 거려본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중얼거리고 있다.
"Aival Buu Hii, Hiivel Buu Ai! : 두려우면 하지 말고, (일단) 하면 두려워 마라!"
어떤 결과에 따른 행동이든, 일단 하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 Category_ 글·생각·소식 | 2008/04/0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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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gii Sanaa Zobooroi! (Don't Worry!)"

난 무언가를 한번 곰곰히 생각하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나쁜 습관아닌 나쁜 습관이 있다. 물론 생각의 폭이 깊다는건 장점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난 그것이 필요이상이기에 가끔은 스스로 자초하여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는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하지만 또 반대로, 몹시 본능에 충실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경악을 할만큼 내가 아닌듯한 단순한 사고를 할때도 있으니, 결국 나는 '모'아니면 '도'로 지극히 양면성이 강하고,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이것은 거의 모든면에서 그러한게 사실이고 말이다. 다행라면 이러한 양면성이 겉보기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만, 사실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대다 이러한 양면성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 위험하다면 위험한다는 것또한 사실이니, 나도 나의 이런 성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정열적이고 적극적이다가도 한순간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이 부실만큼 반짝거리다가도 한순간 어둠의 포스에 휩싸여 우울함을 함께 몰고 다니기도 하는게 바로 나다. 늘상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다가도 한순간 극단적 소심쟁이가 되어 사람들을 피해 숨어버릴때로 있고, 또 참고 참고 잘 참다가도 한번 화가 나 폭발을 할땐 상대방이 다시금 일어서기 힘들정도로 KO패 시켜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 결론은 종 잡을 수가 없는 그런 성격이다. 무언가 마인드 컨트롤이 되야하는데, 평소에는 어느정도 스스로 컨트롤을 하지만서도 점점 상황이 극적으로 치닫을 수록 컨트롤을 못하게 된다고나 할까? 그래서 난 컨트롤이 되지 않을때면 한걸음에 집으로 뛰어들어와 휴대폰을 끄고 숨어버린다. 필요이상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나중엔 후회란 것을 하게될까봐. 사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내가 나를 100% 다스릴 수 있으련지 의문이고, 걱정이 앞서기는 앞선다는.

이번주도 그러했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했고, 지나치게 일들을 너무 잘해냈고, 지나치게 혼자서 뿌듯해하다가 잠깐의 사람들의 냉대에 지나치게 움찔하여 극단적 소심쟁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내가 잠시 소극적으로 변해버린건, 이곳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나는 현지 직원들보다도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게 사실이고, 외국인이라 언어소통에도 문제가 많으며, 또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거늘 도대체가 사람들이 반응이 없는대다 이걸 넘어서 '도대체 너 지금 뭐하는데?!'라는 반응이 몹시 마음에 들지가 않는 것.
결코 내가 하는 일들을 보고 감탄을 하며 칭찬세례의 세례를 해주길 바라는것도 아니며, 사실 기대자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이렇다할 반응이 딱히 없으니 기운도 나지 않을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잘 된 것인지 혹은 이들에게 정말 필요하고도 좋은 일인지를 알기 어려울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됐는지, 혹은 괜찮은건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으니 옳은 일을 옳게 하고 있면서도 계속해 의구심을 갖게 된달까? 또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를 않으니 실질적 업무를 하는 사람인 동시에 중재자인 나로써는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측이나 KOICA측에 무언가를 확실히 이야기해주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점이 사실이다. 뚜렷히 원하는 바가 있어 이걸 서로 이야기해가면서 기관내 무언가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손 놓고 모든 일은 나한테 다 넘긴채 가만히 지켜보고만있으니, 기관장도 아닌 나는 내가 모든 것들을 다 결정하고 합의해도 되는건지 조금은 의아하다면 의아한. 그렇다고 "희근씨가 알아서 잘 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어떻게보면, 도움을 받는대는 익숙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원조가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사실상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이것들을 말하지 않아도 원조기관에서(예로, 선진국에서의 원조나 각종 국제기구에서의 원조 등) 알아서 다 해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어떠한 면에선 이것이 사실상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또 자신들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하며, 더불어 이것을 얻고 배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부터 알려주고 가르쳐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것부터 조금은 엇나가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많은 외국의 파견 인력들이 더욱 힘들어하는 것일테고 말이다(적어도 그러한 신분으로 일을 하고 있는 나로써는 그렇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괜한 걱정이고 괜한 고민, 또 괜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정작 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어찌보면 결론은, 그렇기에 Bitgii Sanaa Zobooroi! (Don't Worry!) 한번은 진지하게 다시금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지금은 잠시 잊어버릴 필요성이 있는 문제. Martaarai, Martaarai. (Let's Forget.) 하지만 다시금 마음은 무겁다.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8/03/1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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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꽤나 짜증이 났던 한 주 였다.
일단, 1) 4일간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고, 2) 이로 인해 도서관 사서와 우리집 주인이 싸웠었으며, 3) 새로운 일 한가지가 더 늘고, 4) 또 병원도 갔어야했고, 5) 인터넷이 되지 않아 한국도서관협회에 보낼 원고를 제때 마쳤어도 보내지를 못했었다.

1), 2) 전기가 나가면? 배고픈 나날들
이곳은 가스렌지가 아니라 전기 스토브를 사용하기에 전기가 안들어오면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없다.
4일간 얼마나 배고팠던가. 또 얼마나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또 원고를 쓰고 싶었던가. 결국 나는 KOICA 유숙소로 향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이틀은 이렇게 보냈고, 이틀은 집에서  Laa(초)와 함께 명상의 시간을....
그리하여 주인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의 반응을 보여 주인과 통화를 한 Uugi 사서는 몹시 화가 나 주인에게 화를 내셨다.
"외국인이라 집세도 비싸게 냈고, 개인적인 세금이며 관리비며 기타 등등 돈이란 돈은 다 냈다. 그리고 최소 너한테 이렇게 말하기전에 우리도 개인적으로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서 알아볼 만큼은 알아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다. 4일간 전기가 나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어쩜 그렇게 나 몰라라 할 수 있느냐. 처음에 연락했을때 집주인인 네가 해결을 해줬어야하지 않았냐. 하물며 몽골인이 살아도 당연히 그렇게는 해주겠다. 도대체 뭐냐. 아님 최소한 지금쯤이라도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니냐. 지금 말하는 투가 그게 뭔데."
아, 무서웠지만 내 속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주인은 그냥 전화를 뚝 끊어버렸고, 결국 사서들의 인맥으로 이래저래 연락이 닿아 전기수리자는 집에 온지 10분만에 전기를 고치고 갔으니, 집은 만족하나 계약기간이 다 되면 이사를 갈 생각이다. 좋은 집주인을 만나야한다. 좋은 집주인을....
- 작년 9월에 주기로 한 책장을 올해 2월에서야 받았다.
- 한겨울, 파르가 고장나(밖의 온도는 영하 35-40도) 난 주인의 외면속에서 일주일간 추위에 떨어야했다.
- 또 이번주는 전기가 고장나 4일간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도 제대로 된 전기수리자 연락처 따위 알아봐주지 않는다. 또한 이번 전기 고장은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밖의 전선이 나가 전기가 나간것. 하지만 그래도 돈은 내가 낸다.

4) 병원의 장기전
병원은 3-6개월 정도 장기전으로 치닫아야할 것 같다. 이젠 그냥 그러려니. 꾹 참고 한번 열심히 의사선생님을 따라 치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아, 타지에서 몸이 아프다는건 정말이지 몹시도 힘겨운 일이다. 아프지를 말아야지.

5) 인터넷.. 더이상은 할 말이 없다
이런 #할 인터넷 같으니라구. sky## 너무한다. 어제 원고를 마쳤으나 인터넷이 되지 않아 원고를 보내지 못했던. 결국 이래저래 시간을 소비하다 밤이 늦어 버렸고, 집 근처의 인터넷 카페는 이미 문을 닫아버렸으며, 또 다른 곳에 가려해도 시간이 늦어 포기를 해야했었다. 일단 9시가 넘으면 내 생각에 밖으로 다니지를 말아야 한다. 6시라도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안좋은 일을 당하는 곳이 이곳이 아니던가. 암, 해가 지면 차라리 나가지를 말아야지. 결국 하루 늦은 오늘 겨우 원고를 보낼 수가 있었다. 허나 몽골에서 가장 크다는 인터넷 회사인 이 곳, 늘상 문제다. 아, 왠지모를 분노의 수준까지 갔던 어제 하루였다.

하지만, "be okay."라 말하며 또 한주를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난 속이 좋아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지도. 잠재적 화병을 앓고있는 예비 환자랄까?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8/03/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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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몸이 좋지 않았는데, 무리를 하다 결국 결근을 한채 집에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까지 되고 말았었다.
정신을 차려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갔더니, 위가 이전에도 계속 좋지 않았는데 역시나 내시경을 하는게 좋겠다고 하여 내시경 스케줄을 잡았고, 또 산부인과 진료도 권유받아 이쪽에도 가게 되었다.
내시경은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측근들의 권유로 새로 생긴 울란바타르 송도병원에서 하였고, 결과야 당연히 위염. 위산이 역류하여 식도가 헐어 식도염이 있는대다 담즙이 올라왔다는데, 아무튼 내시경 결과 출혈의 흔적도 작지만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위궤양은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산부인과는 연세친선병원에 한국인 의사분이 계셔 이쪽으로 갔는데, 초음파 검사를 통해 여러가지 진단을 내려보니, 자궁내 생리혈이 많이 있으나 나오질 못하고 있는거라 말씀하셨던. 그런데 무월경 증상이 나타난지 오래라(원래 불규칙하긴 하지만) 여러가지 사항을 조합해 볼때 갑상선과 호르몬 검사를 해보는게 좋겠다고 권유받게 되었다. 몽골에 오고 나서 더욱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또 생리주기가 더 불안정해진대다 생리통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해 타이레놀을 하루에도 3-4알 이상 먹을 지경이었기에 당연히 검사에 응할 수 밖에.
결국 장비가 있는 Mobio 센터로 가서 TSH와 Prolactin 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가지고 다시 연세친선병원으로 가니 다행히 갑상선은 아니라던(이때문에 주말내내 어찌나 우울해하고 또 걱정을 했던지 말로는 다하지 못할 것이다). 여튼 결국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을 받아 다시 송도병원으로 가서 이를 말하고, 처방된 약을 바꾸었다. 송도병원에서 준 약중 2알 정도가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들이었는데,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은 호르몬 약과 마찰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왔다갔다하다보니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쓴 돈만 $100이 훌쩍 넘어버렸다. 물론, KOICA측에 청구하면 후에 돈을 돌려받기는 하지만, 언제쯤에야 받을 수 있을련지 가늠할 수는 없고, 기초적인 생활비마저 타격 받게 되었다. 한국에 $400을 보낸게 큰 타격이라면 타격이고, 작년 7월부터 3-4번, 또 최소 20-30% 이상 오른 물가에 KOICA에서 지급 받는 생활비는 그대로인것도 문제라면 문제고. 아직 3월 중순도 되지 않았거늘 통장 잔고는 그야말로 바닥이다.
그래도 SOS 타고 한국으로 갈 정도의 큰 병은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 단원들은 곧잘 농담삼아 죽지 않을 만큼 병에 걸려 SOS 타고 한국가고 싶다고 말하긴하지만(나또한 그러했지만), 막상 이렇게 아파서 병원에 왔다갔다하니 그렇게 아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
끼니때마다 잘 챙겨 먹어야한다는 말,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는 말,
또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말 등등

의사선생님께서 당부하시고 또 하신 말들은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많은 중요한 업무가 밀린대다 이를 도맡아 해야하는 나로써는 사실 지금 당장 휴가라도 낼 수가 없는 상황이라 울것 같은 상황이긴 하다.
쉬어야하는게 맞는데, 쉬어야만 하는데 쉴 수가 없다. 한국자료실 설치사업(*)과 관련해 한국에 보낼 문서도 여럿이고, 이곳에서 끝마쳐야할 서류들도 여럿이고, 기존의 밀린 업무에 KOICA의 프로젝트에 새로운 일들은 더더욱 늘어만 가는데, 이를 다른 사서에게 떠넘기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그저 빨리 헤치워버릴 수 밖에. 하지만 이 모두를 홀로 감당하려니 일은 진척은 또 어찌나 느린지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나는 단순한 볼런티어인데, 어찌된게 일반적인 워커(현지 직원)보다도 더한 업무에 더한 스트레스에 더한 책임감 그리고 또 그 이상을 느껴야하는지 매우 큰 의문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런걸 그저 미뤄버리고 나몰라라 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그저 해야만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있는 내 자신이 스스로 어이가 없기도 하다. 완벽주의적인 성격도 좋지만, 지금은 그것이 필요한 그런 때가 아닌데 말이다.
할 일이 있어서, 차라리 바빠서 좋겠다고 말을 하는 단원들의 말도 더이상은 듣기가 싫다. 어느정도의 업무과중이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럴싸한 일을 하고 있어서 좋겠다는 말이 나오는지 과연 의문이다. 그렇다면 제발 하루만 나와 업무를 바꿔서 해보길 바란다. 아마 일의 압박감에 스트레스에 업무 과중에 하다못해 회의감까지. 하루에 중도귀국을 열두번도 생각하게 될것이다. 더이상은 주말 근무도 싫고, 새벽까지 집에서 일을 하는 것도 싫고, 인터넷때문에 KOICA 유숙소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것도 싫고, 이렇게 몸이 아픈대도 일을 해야하는게 싫다. 아, 그런데 업무 조율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다들 빨리 진행을 해야할 일들 뿐이거늘.

(*) 한국자료실 : Window on KOREA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해외도서관에 한국자료실을 설치해주는 사업을 작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올해에는 러시아국립도서관, 중국상해도서관과 더불어 이곳 몽골 국립도서관이 선정되었다. 이에 관해선 다음번에 자세히 이야기를 할터.
[참] 2007년 설치 도서관 - 미국퀸즈공공도서관, 베트남국립도서관, 태국국립도서관

+) 글을 쓰고보니 이거 참.. 뭐라고 해야할지. 드디어 폭발을 하려나보다. 마음을 다스려야지. 다스려야지.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8/03/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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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된 부서는 관장, 부관장님 직속이나 다름이 없는 '정보기술교육과'인데, 담당된 업무는 '서고보존과'의 일이라(한국학 전담) 자리의 배치는 당연히 한국학 자료가 비치된 동양서고였었다.
사진이 바로 동양서고에서의 코워커와 내 자리의(좌측) 모습. 파견초부터 무수히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인지 더욱더 기대 자체를 하질 않고 제로의 상태로 몽골로 향한지라 이렇듯 열악한 환경은 견딜만 했다. 한국에서도 열악한 도서관으로 장기간 봉사활동을 다녔었기에 사실 환경 자체는 하루만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다.
하물며 현지 사서들조차 몸소리치는 이곳에서 무려 3달 가까이를 난 군소리 없이 굳건히 버텨내었고, 사서들이 나를 챙겨가며 걱정을 해줄 정도였으니, 더이상 설명하지않아도 다들 잘 아리라 생각한다. 딱 사진보다도 7배 정도는 더 열악하달까? 일단, 사진에서의 바닥은 바닥이 아니라 나무 판자로 공중에 떠 있어 삐걱이는건 기본이고, 아래 바닥이 보이는건 당연지사다. 즉, 나무 판자를 덧대어 하나의 룸을 두개의 층으로 임의로 나눈 것이다. 폭발적인 장서의 수를 감당하지 못한채 이리 되었달까. 더 쉽게 설명을 하자면 아래 사진을 보면 되겠다. 아래가 정기간행물서고, 윗층이 바로 내가 있는 동양서고.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학 자료들의 상태는 가히 처참하다.
6,700여권 정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몇 번이고 정리를 시도하다 결국엔 포기를 했다고 한다. 첫번째로는 한국어를 아는 인력자체가 없었고, 두번째로는 소장 자료 자체가 1950년대 북한에서의 자료교환을 통한 오래된 서적이라 이용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료들을 대충 훑어보니 김일성 주체사상과 관련된 사상서들이 생각보다 많이 소장되어 있었고, 이전에 한국어를 아는 누군가가 필사로 도서대장 정리를 한 것을 발견하였으나(나와 몽골 국립도서관의 사서들 모두 언젠가 있었을 북한인 사서로 추정), 사실상 이것도 재작업을 해야되는 일이었기에 새로 시작해야되는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동양서고 안에서 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공간 자체가 매우 협소하여 두 사서가 각각의 파트들을(중국자료, 한국자료) 동시에 진행하기엔 사실상 무리수가 있었고, 한국학 자료에 대한 신도서대장을 그 무엇보다도 컴퓨터로 작업하기를 나는 희망하고 있었기에 공중에 붕 떠 있는 동양서고엔 컴퓨터를 들여놓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몇 달째 컴퓨터 없이 그야말로 빈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나에게 기관측에서 큰 돈을 들여 컴퓨터를 사주겠다고 한건 나에게 있어 매우 감사한 일이었고,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기로 하였으나 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평소 먼지 알레르기로 만성 비염을 앓고 있던 내가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먼지 속 서고에 콕 박혀 세달을 있었으니 건강상의 문제도 생겨 결국엔 자리를 이동하기로 협의를 하였다.



옮긴 자리는 2층의 자료기획과 사무실.
신간도서의 입수와 기증, 카드목록과 더불어 국내외 자료 기증/교환 업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는 사무실이었다. 3명의 여자 사서분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연령대가 높았고 몽골 국립도서관에서 근무를 하신지 꽤나 오래된듯 보였다.
기쁘게 맞이해주시며 서로를 소개하고 업무를 진행하였다. 동양서고에서 고생이 많았다며 어머니처럼 챙겨주시는데 그야말로 감사하고 왠지모를 어린아이가 된양 수줍어 어린아이 같은 부끄러운 미소를 지은 생각이 난다.



그리고 빼곡히 가져다 놓은 각종 사전들.
러시아어 사전이 필요할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질 못했는데,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라 그런지 BBK의 분류며 여러곳에서 몽골어도 아닌 러시아어들이 튀어 나왔다. 결국 북한에서 출판된 로조사전을 가져다 장기대출을 신청하곤 활동지원물품에 러시아어사전을 넣어놓았다.

:: Category_ KOICA MONGOLIA/몽골 국립도서관, 도서관계 | 2008/02/2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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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지 146일. 이제 584일이 남은건가.
이곳에서의 날짜셈은 꼭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은 584일 항상 좋은 꿈이기를.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7/12/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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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을 하다 이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기타(Guitar)를 배우고 있다.
오늘로서 2주차 두번째 수업. 이제 코드를 몇 개 배웠을 뿐인데도 왼쪽 손가락 끝은 얼얼해 지릿한 느낌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되려 이런 고통을 즐기고 있는 나. 이런 아픔따윈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며, 설마 내가 인생을 살면서 느낄 아픔보다도 이것이 더 아프겠느냐며 그저 허탈하게 웃곤 한다. 적어도 후에 내가 기타를 켜며 느낄 행복감보다도 지금의 이 아픔은 결코 크진 않을테니까.



그리고 기타를 사면서 오기 아닌 오기를 부린 스스로가 귀여워 피식 웃기도 한다. 이 기타를 자유자재로 켜며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전까진 몽골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고집 센 어린아이 같은 오기를 부렸으니까. 그래도 내가 내린 결정에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이런 것이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 삶에 작은 활력소는 되고 있으니까. 물론 배우면서 나름대로 스트레스는 조금 받고 있긴 하지만, 기타 수업과 몽골어 수업은 나의 주된 일들보다도 더욱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썩 괜찮은 여가활동이 아닌가.
그래, 지금처럼 이렇게 시간이 가는거라고 생각을 하니 되려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조금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하루가 갈때마다 조금씩 더 크게 나에게로 다가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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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7/12/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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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국립 울란바타르 대학교(UB 시립대)에서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초대를 받아 행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행사 후 나는 UB 시립대에 한국어 박시(선생님)로 있는 신은애 단원과 집으로 향하였다. 국영백화점(이흐 델구르)쯤에서 헤어진 우리는 밀려드는 피곤함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식료품이 다 떨어져 백화점 내의 슈퍼마켓에 들렸고, 간단히 장을 봐서 집으로 가기로했다. 그때가 오후 5시 반쯤된 시각.

이른 시간이라면 이른 시간이지만, 해가 짧아진 요즘 주위는 어두웠고 지름길로 가려다 위험하다 싶어 큰 길가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가 마주친 거리의 아이들. 이곳 몽골에는 집이 없어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우리나라의 홈리스와 같은), 특히한 점은 그 속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대게 동냥을 하거나 쓰레기를 뒤져 먹거리를 마련하고, 또 맨홀 아래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 이미 이런 아이들을 몇 번이고 겪어본 나로써는 당연히 그들을 피해 가고자 했다. 거리에서 닳을만큼 닳은 아이들이기에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또 이들에겐 담배와 욕설 더불어 폭력까지도 너무나 당연한 일상생활 자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늘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하기에 어설픈 한번의 도움은 오히려 자신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번의 도움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론 그들을 철저히 무시한채 지니갈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들은 나에게 다가와 동냥을 하는것도 모자라 이내 내 양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고, 또 이미 위협의 수준으로 옮겨가 나에게 돈과 먹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좋게 달래도 봤고, 소리를 치며 화도 내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더 꽉 잡고 놔주질 않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몽골에선 이런 일이 있어도 잘 도와주지 않는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몽골 남성이 다가와 아이들을 쫓아내주었고, 그 덕에 나는 다시 길을 갈 수가 있었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던 나에게 잠시 후 또 다가온 아이들. 그러나 그 몽골 남성이 다시 다가와 아이들을 쫓아내주었고, 나는 고마운 마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두어번 다시 한 후 조금은 무서워진 마음에 다시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느새 옆에 다가온 그 몽골 남성. 흘깃 곁눈질로 나를 계속 보더니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대답을 했다. 허나 그 남성은 길을 가는내내 내 옆에서 내 눈치를 살폈고, 그런 행동들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가는 길도 같고, 또 혼자 가는 내가 걱정이 되서 그러려니 생각을 했다. 그러다 그는 ‘타닐치야(인사할까요)’라며 이름이 뭔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왜였을까. 나를 도와준 사람이거늘 귀찮은 마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계속 길을 가는데, 또다시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아이들때문에 놀라 정신이 없었던 찰나, 이런 그의 물음에 이내 정신이 들기 시작했고,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표정을 굳힌채 그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를 따라와 이내 내 앞을 가로 막곤 같이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 집에 같이 가자 등을 연발하며 본격적으로 나를 귀찮게하기 시작했다. 작별인사인 ‘바이에스테’를 연발하다 나는 결국 가라며 나는 화를 내기 시작했고, 또 이리저리 그를 피했으나 그는 계속 쫓아와서 치근덕될 뿐이었다.
결국 안되겠다싶어 남자 단원 몇 명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다들 지금 당장 올 수 있을만한 상황이 되질 않았다. 토요일 오후인대도 착다(경찰)는 보이질 않았고. 결국 나는 집을 지나쳐 KOICA 유숙소로 향해야했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유숙소는 Peace Corp.이나 여러 국제기구가 바로 같은 구역 안에 위치해있어 찌쭈르(경비)도 여럿이고 나름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팅기스 극장을 지나쳐 1차 찌쭈르가 있는 문까지의 길이 인적이 드물어 유숙소로 향하는내내 걱정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제 따라올만큼 따라왔으니 그만 갈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던중 그 남성은 갑자기 나를 확 잡아 끌어 큰 길가 옆의 어두운 샛골목으로 끌고 가려고 했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이를 뿌리치고 큰 길가로 가려는데 순식간에 다시 잡히고야 말았다. 결국 또다시 끌려가고 있던 찰나 몹시 놀란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큰 길가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남자도 놀라 순간적으로 내 팔을 놓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정신없이 앞을 향해 걷고 뛰었다. 무조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된다는 일념하에.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정신없이 걸어 근처의 팅기스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같은 기수인 신은애 단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저 도와달라고 전화를 한거였는데, 단원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쏟아져 결국 목놓아 울게 되었다.

아마도 기관에서의 일과 지금 일어난 일과 더불어 그동안의 일들이 한데 뒤엉켜 많이 서럽기도 서럽고, 또 무서워서 그렇게 울었던것 같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울었는데, 나에게 그 순간만큼은 주변의 사람들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진정이 될때쯤 연락을 받은 단원들이 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단원들의 괜찮냐는 말에 괜찮다고 대답을 했지만, 곧이어 도착한 같은 기수 은애언니가 나를 꼭 안아주자 다시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일로 이렇게 울어야하는지 화가 났고, 또 서러웠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그러다 단원들과 유숙소로 향했고, 그곳에서 어느정도 진정을 한 후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평소보다도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되는 이유와, 반대로 또 굳이 있지 않아도 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2주 간격으로 벌어진 이런 일들이 감당하기 벅찰정도로 부풀어 어찌할바를 모르게 되었다.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고 동그랗게 몸을 만채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하루란 시간들을 여럿 보내고만 싶었다. 중도귀국 역시 꼬리의 꼬리를 문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를 않았고, 같은 생각, 같은 결론, 같은 두려움을 계속해서 느껴야만 했다. 이제 몽골생활을 한지 4개월. 앞으로 이곳에서 보낼 날들이 더 많기에 또다시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결국엔 나쁜 일들이 벌어져 지금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한껏 움츠러들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서웠고, 하다못해 거리의 자그마한 아이들마저도 무서워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이제 단원생활을 시작했을뿐이라는 오기에 벌써부터 돌아갈 생각을 하는 내가 못내 못마땅해지기도 했다. 단원생활 하나만을 보고 이곳에 왔거늘 다른 이유로 이곳을 떠난다는게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채 돌아간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선 용납의 ‘ㅇ’ 조차도 되지 않을정도로 용서가 되지 않을 일이였으니까. 또 나름대로 생각했던 이곳에서의 이상과, 포부와, 그리고 큰 다짐에 대한 패배감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어떻게 책임지고 또 감당해낼 수 있을지 상상조차도 되질 않았다. 나야말로 깊게 생각하고 또 고민해서 단단히 마음먹은 일이라면 무조건 해내고 말아야 직정이 풀리는 성격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인 ‘후회’란 것을 할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중도귀국을 한거나, 아니면 KOICA에 지원했던 이 일조차도 후회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말이다.

견딜 수 있을만큼. 이왕이면 끝까지. 아니, 오히려 그 기간보다도 더욱 길고도 알찬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은 물론 아직도 크다. 그러나 이런 욕심과 포부보다도 살아가면서 내게 큰 상처가 될만한 일이 벌어진다면, 혹은 벌어질 확률이 크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는게 옳다고 나또한 생각을 한다. 어찌됐건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먼저 바라봐야하고, 또 생각해야하니까.
하지만 그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미칠정도로 많이 힘들고, 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지금, 물론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또 이겨내야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역시 마음은 아프고 몸도 병들어 가고 있다는걸 스스로가 잘 아니까 그게 두려운 것이라는걸 나또한 잘 알고있다. 잔뜩 상처를 받아 결국엔 다시 일어서지도 못하게 될까봐, 그렇게 될까봐 지금 이순간 내가 내릴 결정이 힘이 든거고, 많은 고민이 되는거라는  생각이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이상을 따라도 되는걸까 라는 두려움.
마음과 몸은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는걸까 라는 나름대로의 희망적인 질문들.

결국 이런 고민 끝에 언제나처럼 이상을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은 나이지만, 부디 이 결정이 옳은 것이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내가 제대로 된 확신을 가지고 다시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 일에 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도 바라고 있고.
괜찮을거라고, 잊혀질거라고, 또 당연히 이겨낼거라고 끝없이 스스로를 달래가고 있으니, 나의 이런 결정이 후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채 역시 옳은 결정이었노라고 말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간절하니 이루어지겠지. 여느때처럼. 그리고 나 노력중이니까.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7/12/1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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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근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타이밍도 기가 막힌것이, 지난주 기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그대로 나를 주저 앉히고야 말았다.

기관 사람, 그것도 몽골인이 아닌 티베트인에게 성추행을 당해 심적으로 더 많이 힘들어진 것.
그가 내 볼에 한 타액이 뭍을 만큼의 키스와 "'i want you'란 말을 한국어로 어떻게 말해? i want you."란 말. 그 사건이 있기 전후의 스킨쉽 등. 치욕스럽다는 것이 바로 이럴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제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한들 이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고, 문화적 차이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근무시간에 그것도 근무지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는 술에 취해있었으며 이런 일로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만난 첫날부터 상식밖의 행동을 하여 의도적으로 내가 그를 피한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서에게 한국에서 온 사서는 자기를 싫어하고 또 무서워한다고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개방적인 곳이라지만 유부남이기까지 한 그의 행동과 언행은 상식을 벗어나 도저히 참을 수 있을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결국 계속해서 참고 있었던 것들이 터져나와 정말 미치기 직전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것들을 그래도 지금까지 꾹 꾹 눌러참고, 또 스스로를 달래가며 억지로 견뎌내고 있었거늘 가만히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너무나 싫어졌고 지금이라도 당장 짐을 싸서 어디론가로 가고 싶었었다.

일이 있은 직 후 코워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역시 그 다음날은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오늘의 도서관 사람들은 어제와 달랐고, 나는 불편함을 느껴야했다. 도서관에 들어서서 내가 나가는 그 순간까지 모든 시선들이 나를 쫓았고, 내 이야기로 항상 분주했다. 화가 났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물론 이것을 그들도 잘 알고는 있겠지만, 평소처럼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루만에 사이가 서먹해져버렸고, 그래서 더 끔찍해져버렸다. 이런식으로 정말 2년을 지낼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면서 지금까지 느꼈던 힘겨움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물론, 그들이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어제 사건을 하루종일 거론하길 바란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딱딱하고도 서먹한 분위기와 그들의 시선, 수근거림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차라리 어제의 이야기를 들춰내며 나쁜 놈이라 호들갑을 떠는게 더 나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그것이 몽골의 집이든, 한국의 집이든 집에 가고 싶었다. 차라리 내 눈치를 보지말고 평소처럼이라도 행동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들은 말이 없어졌다.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죄인이라도 된듯한 이런 분위기에 견딜 수가 없어 점심을 먹고오자마자 퇴근을 서둘렀다. 더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제 한계가 온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이상 견디기 힘든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게 모른척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내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라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나도 참 크게 상처를 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난 혼자가 아닌데 계속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을 나서 집으로 향하면서 KOICA 사무실로 향해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다소 심각해진 분위기. 관리요원은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고 했다. 처음에 강력하게 조취를 취해야 그 후 불미스러운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며 기관장에게 KOICA 측에서 직접 연락을 취하겠노라 말했다. 또 기운 내라면서, 이럴때일수록 기운을 내야한다면서 다독거려 조금은 안정을 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이곳에 오기전부터 충분히 이런류의 일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직접 겪은 지금은 생각보단 더 많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과 또 기관과의 이해관계도 얽혀있어 더욱 복잡했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성적으로도 모든게 해결될 수는 없는 문제이기에 눈물이 났다. 답이 없는 문제였으니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스스로 마음을 다독거리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을 추스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다.
몸 건강히 잘 지내냐는 아버지의 피곤한듯한 목소리에 울컥 눈물부터 났다. 나쁜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를 못했다. 부모님의 기대와 바람(바램)을 져버리고 낯설고도 먼 이 곳에 오기로 고집의 고집을 부린건 나였으니까. 힘들게 선택했고, 힘들게 온 이곳이기에 차마 힘들다고 내가 먼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많이 춥냐는 말씀, 책이며 이것저것 물건은 싸놨는데 아직 못붙이셨다는 말씀, 그리고 건강히 잘 지내라며 국제전화비 많이 나오니 빨리 끊으라는 말씀..
그래서 결국 나는 거짓말을 했다. 잘 지낸다며, 열심히 잘 하고 있다며, 그러니까 아무 걱정마시라고.
통화를 끝내고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든채 바보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나는 왜이리 못난 딸인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보란듯이 잘 지내고, 더 크게 성장하고, 또 부모님의 기대보다도 더욱더 성공해야하거늘, 길을 가다 넘어져 조금은 다친 이 곳에서 그저 주저 앉아 울고 있을 뿐이었다.

몇 일 내내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이런 일 때문에 실망해버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를 달래고도 달랬다.
그리곤 주저 앉은 나를 다시 일으켜세우려 무던히도 애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도 마음이 잘 잡히지는 않지만,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만큼 다시 가보기로 했다. 또다시 스스로를 어루고 달래면서. 이제 자리에서 일어서야 할 때였다.

:: Category_ KOICA MONGOLIA/KOICA/사서/몽골 | 2007/11/2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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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7/11/27 22:07
  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7/11/30 22:39
  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7/12/03 19:39
  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8/02/10 00:23
    • Favicon of http://www.ngnm.net BlogIcon 근사서 2008/02/15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지금은 시간도 좀 흘렀고, 개인적으로도 마음을 다스려 괜찮습니다. 그리고 모든게 마냥 행복하고 편안할수만은 없죠. 액땜으로 생각키로 했습니다. 아무튼 반갑구요, 3월에 몽골에 오시면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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